1900년 독일에서 출생한 유대인으로
에리히 프롬이라는 유명한 철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가 있었습니다.
독일이 나치에 의해 점령 당하자 그는 미국에 와서 교수로 활동하다가
말년에는 스위스에서 살다가 1980년에 80세로 세상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들이 제목만 들어도 익히 아는 책들을 썼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인간 상실과 인간 회복’ ‘사랑의 기술’ 등.
그런데 그가 죽기 4년 전인 1976년에 쓴 책이 있는데
그 책이 유명한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사람을 두 유형으로 구분합니다.
소유지향적인 삶을 사는 사람과 존재지향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두 유형의 차이는 말 그대로
소유지향적인 사람은 소유를 중시하고,
존재지향적인 사람은 존재를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나 석가 소크라테스 등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한결같이 존재지향적인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영국 시인 테니슨의 시와
일본 시인 마쓰오 바쇼의 시를 인용하여 두 유형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갈라진 벽 틈새에 핀 꽃이여 /
나는 너를 그 틈새에서 뽑아내어,
지금 뿌리째로 손 안에 들고 있다. (테니슨).
“눈 여겨 살펴보니 /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이누나!” (바쇼).
두 편의 시는 대상에 접근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테니슨은 꽃을 꺾어 손에 쥐었지만,
바쇼는 꽃을 바라보고 꽃과 일체화하기를 원했습니다.
전자는 소유 지향적이고 후자는 존재 지향적입니다.
소유 지향적인 사람들은 소유하려고 애를 씁니다.
물건에 집착합니다. 재산을 불리는데서 만족을 얻습니다.
반면에 가진 것이 적으면 만족이 없습니다.
가진 것을 잃을 염려에 매어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많은 것을 소유해도 참된 만족을 얻기 힘듭니다.
반면에 존재 지향적인 사람들은
소유보다 존재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의 기쁨과 만족을 누립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누립니다.
물질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에 더 큰 가치를 두기보다
존재에 더 큰 가치를 두기 때문에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행복을 누립니다.
소유는 일시적인 행복을 누리게 하지만
존재는 영속적인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소유는 일시적인 평안을 주지만
존재는 내면의 깊은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삶의 존재 양식도 우리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소유지향적인 사람인가?
존재지향적인 사람인가? 깊이 음미해 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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