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 선생이 발행하던 ‘어린이’ 잡지 1925년 11월호에 ‘오빠 생각’이란 시가 입선작으로 실렸습니다. 수원에 살던 열두살 소녀 최순애가 서울 간 오빠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였습니다. 오빠는 동경으로 유학 갔다가 관동대지진 직후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태를 피해 가까스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가서 00 소년운동과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집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오질 못했는데 그가 집에 올 때면 여동생 순애에게 늘 선물을 사 왔습니다. 한번은 ‘다음에 올 땐 우리 순애 고운 댕기 사갖고 올께’라고 말하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서울 간 오빠는 소식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끝내 집에 돌아오지 못합니다. 가을 낙엽이 우수수 지던 날 순애는 오빠를 그리워하며 과수원 밭둑에서 서울 하늘을 바라보면서 시를 지었습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뜸북새와 뻐꾹새가 울던 봄부터 기러기 귀뚜라미가 우는 가을까지 기다려도 오빠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해인 1926년에 마산 출신 16세 소년 이원수는 자기가 지은 ‘고향의 봄’을 ‘어린이’지에 투고했는데 입선되어 실렸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 한국인이라면 어릴 때 누구나 부르며 자랐던 정겨운 노래입니다. 소년 이원수는 ‘오빠 생각’을 지은 최순애에게 펜팔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둘은 7년간 편지 교환을 하면서 서로 얼굴도 모른 채 결혼까지 약속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수원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원수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일본 형사에게 체포돼 1년간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최순애의 집에서는 소식 없는 그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고 했지만 최순애는 완강히 거부하며 이원수를 기다렸습니다. 1년 후에 풀려난 이원수는 최순애의 집으로 찾아오게 되고 둘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3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민족적으로 아픔을 겪던 시대였지만 사랑은 아름답게 피어났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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