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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 우간다 트립 (5)

admin2014.04.18 14:17조회 수 1682댓글 0

오후에 MCCA(Muclo Children Care Associate)에 참석했다. 나무 그늘 아래 넓은 공터에 

10여명의 월드비전 자원 봉사자들로 구성된 교사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며 율동과 함께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주었다. 


각자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고 저들의 사역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저들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집으로 방문해서 교육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교육뿐만이 아니라 부모처럼 아이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이곳에는 에이즈로 부보들이 일찍 죽어 고아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생활도 어렵지만 남을 돕는 일에 자원해서 봉사하고 있는 그들이 천사처럼 보였다. 


그 중에 몇 사람과 함께 어느 가정을 방문했다. 엄마는 1998년에 에이즈로 사망했고 

아빠는 2003년에 역시 에이즈로 사망하여 아들 3형제만이 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큰 아이부터 12학년 10학년 7학년이었다. 밖의 나무 밑에는 어미 돼지 한 마리가 누워 있었고 이틀 전에 

낳았다는 돼지 새끼 일곱 마리가 서로 싸우며 젖을 빨고 있었다. 


저들이 다 쓰러져가는 집에 그냥 남아 사는 이유는 아빠 엄마의 체취가 있는 곳이라 떠나기 

싫다는 것이었다. 저들을 위해서도 내가 대표로 기도를 했다. 우리는 이들을 도울 힘이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저들의 아버지가 되셔서 저들에게 진정한 소망이 되시고 용기와 인내를 갖고 힘 있게 살아가게 하시기를 간구했다.


시애틀에서 오신 허영 집사님이 후원하는 에드워드를 만나기 위해 그가 다니는 학교를 방문했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서 있는데 허 영 집사님은 수십 명의 아이들 중에서 에드워드를 금방 찾아내고는 “네가 에드워드구나”하면서 반가워했다. 


3년 전부터 후원한 아이였고 사진으로 많이 보았기 때문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이미 월드비전 직원이 학교에 이야기 해 놓아서 에드워드는 조퇴를 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에드워드를 차에 태워 그의 집으로 갔다. 가족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아홉 살이었고 4남 2녀의 둘째 아들이었다. 어제 갔던 앨리스 집과 비슷한 집이었다. 낮인데도 집안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밖에 따로 있는 부엌은 한국의 돼지 우릿간 만도 못하게 엉성하게 지어져 있었는데 숯을 담은 자루 하나와 숯불 위에 찌그러진 냄비하나가 있는데 노란 콩이 물에 끓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것은 하나도 없었다. 


허집사님은 시애틀에서 가축병원을 경영하는 분으로 신앙이 아주 좋으신 분이었다. 그 분은 에드워드에게 축구 공, 장난감, 연필 가방 등 많은 선물을 안겨 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에드워드의 사는 모습이 너무 가난하여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 분은 월드비전을 통해 열 명의 아동을 후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이 어제 이런 말을 한 것을 들었었다. 자기는 지금까지 먹고 사는 일에 너무 바빠서 여행이나 휴가를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었으며 이번 우간다 여행이 처음 여행이라고 했다. 


먹고 살기에 바빠 여행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분인데도 열 명의 아이들을 돕고 있다는 것이 내 가슴에 강한 인상을 주었다. 허 집사님은 에드워드의 운동화도 사왔는데 사이즈가 어른 것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니 발이 굉장히 큰 것 같이 생각되어 큰 것을 샀다고 한다. 

에드워드에게는 엄청 큰 사이즈인데도 그는 그것을 신고 끈을 매고 걷기고 하고 뛰기도 하며 마냥 행복한 표정이었다. 


어릴 때 생각이 났다. 우리도 어릴 때 운동화 신기가 어디 쉬웠는가? 초등학교 때는 내내 검정 신발을 신고 다녔고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운동화를 사서 신었는데 다 헤어져 너덜거려도 새 것을 살 여유가 없어 신고 다니지 않았던가. 초등학교 때 신발이 다 떨어져 아버지가 새 신발을 사러 가신다고 하기에 나도 따라 나섰다. 오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을 한 시라도 빨리 신고 싶어서 고집을 부리고 따라 나섰다. 20리 떨어진 합덕 장까지 걸어가야 했다. 맨발로 따라 나섰는데 자갈길 신작로를 걸어가는데 발바닥이 얼마나 아팠는지. 다행히 마침 지나가던 짐차가 있어 손을 들었더니 우리를 태워주어서 한결 고생을 덜했다. 그 운전수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에드워드를 뒤에 남기고 차를 타고 떠날 때 허 집사님의 얼굴은 상기되었고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집사님은 “Edward, I want to see you again.” 하고 손을 흔들었다. 에드워드와 그의 가족들도 손을 흔들었다. 우리 모두의 가슴도 뭉클해지며 함께 헤어짐의 안타까움에 젖어 있었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정말 다시 만나 볼 수 있는 날이 또 있을까. 회자정리(會者定離)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인생인 것을....


Katagombe를 출발해 우간다 북쪽에 있는 큰 도시인 Gulu를 향해 달렸다. 20인승 작은 버스를 타고. 글루 까지는 다섯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가는 길은 포장도로였지만 군데, 군데 파여 있는 곳이 많아서 운전하기도 힘들었고 차가 몹시 흔들려 피곤했다. 길가에 침팬지 떼가 놀고 있는 곳이 있어 잠시 쉬어 사진도 찍었다. 


수십 마리 소떼가 길을 횡단하여 지나가는 바람에 차가 잠시 서 있기도 했다. 이곳 소들은 뿔이 대단히 굵고 컸다. 싱싱한 풀은 많은데 소들이 대체로 비쩍 말라 있었다. 글루까지 가는 길 좌우편에는 평평한 땅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마치 전에 시카고에서 미시시피주까지 차를 타고 갔을 때처럼 그렇게 땅이 넓고 평평했다. 개발을 하면 얼마든지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땅이었다.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서라도 경제개발에 역점을 두면 미래가 활짝 열릴 것 같다. 먼저 고속도로를 사방에 건설하고 치수(治水)를 잘하고 수많은 인력을 흡수할 공장을 건설하여 가동시켜나간다면 몇 십 년이 안 되어 가난도 추방될 수 있을 것 같다. 


1971년에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이디 아민이 1979년 축출될 때까지 수십만 명을 죽이고 우간다의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갔던 것을 생각하면 한 사람의 애국적인 지도자가 얼마나 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 한국도 경부 고속도로를 건설하고자 할 때 당시 야당과 재야 세력들이 얼마나 반대를 했었던가. 그런 압력에 굴복하여 당시 고속도로 건설을 못했다면 한국의 경제성장에 큰 차질이 빚어졌을 것이다.


오후 1시가 넘어 글루에 도착하여 월드비전 글루 사무실에 들렀다가 호텔에 가서 짐을 풀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깨끗한 호텔이라는 데 하룻밤에 숙박료가 20불이었다. 호텔에서도 미국에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가난한 나라지만 셀 폰은 발달해 있어서 곳곳에 셀 폰 회사들의 광고문이 있었다. 셀 폰 가게에 가서 카드를 사서 처음으로 미국 집에 전화를 걸었다. 


저녁에 모두 함께 시내를 둘러보았다. 시장 안에 들어가 보니 꼭 동대문 시장 같은 곳이었는데 점포가 얼마나 많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오랜만에 사람이 많은 시장 구경을 했다. 좌판에 훈제된 생선을 놓고 파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위에는 파리 떼가 덕지덕지 불어 있었다. 시장을 벗어나 한 참을 걸어가는 동안 물통을 든 아이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펌푸 우물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통을 들고 오가고 있었다. 


지나는 길옆에 노아 방주(Noa's Ark)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반군들이 이곳의 아이들을 많이 납치해 가서 저녁이면 아이들이 노아 방주에 와서 잠을 자고 아침이면 각자 집이나 학교로 갔다고 한다. 그 때 숙박한 아이들이 3,000명까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유엔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치안이 많아 나아졌다고 한다.


2월 15일, 월드비전 글루에서 아침 경건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곳의 사역 내용을 브리핑으로 들었다. 월드비전 글루의 캣치 프레이즈가 사랑과 용서와 화해라고 했다. 이곳은 북쪽 국경에 가까운 곳이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군들이 세력이 미치는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납치되어 갔었다고 한다. 이곳 월드비전의 사역 가운데 하나도 납치당했다가 탈출해 온 아이들을 재활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넓은 사무실 벽에 의미 있는 그림들이 벽 사방으로 가득 붙여져 있었다. 내용은 연결되는 것들이었다. 그 그림의 내용을 연결하면 이런 내용들이다. 평화롭게 사는 가정이 있다. 반군이 침입한다. 가족들을 납치해간다. 납치당한 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군대가 수색 작전을 편다. 그들을 구출한다. 구출된 사람들을 월드비전에 인계한다. 


월드비전에서 그들을 따뜻하게 보호한다. 그들에게 기술을 가르친다. 다시 새로운 가정을 회복하게 한다. 이런 케이스에 속한 두 사람이 우리들 앞에서 간증을 했다. 저들은 어릴 때 납치되어 갔었기 때문에 영어를 할 줄 몰라 통역을 해야 했다.


먼저 아그네스라는 17세의 소녀가 우리들 앞에 앉아 간증을 했다. 아그네스는 8세 때 부모님을 따라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17명이 함께 반군들(rebels)에 납치를 당했다. 아그네스는 반군의 한 부대 대장의 집에서 종으로 부림 받으며 살았다. 


부대장의 성적 노리개도 되었는데 부대장에게는 아내들이 서너 명이 있었는데 그 여자들에게 수없이 매를 맞았다. 납치되어 있는 동안의 삶은 너무도 처참했다. 담력을 키운다고 죽은 사람의 피도 입으로 핥게 했고 사로잡은 정부군을 바로 앞에서 총을 쏘아 죽이게도 했다. 그러다가 14세 때 임신하게 되었는데 정부군과의 전투에 나갔다가 전투 중에 산에서 아이를 낳았다. 옆에 함께 있던 동료 여자가 아기 탯줄을 끊어 줬다고 했다. 


함께 납치되었던 17명 중 7명이 죽고 10명만이 생존해 있었는데 그 중에 여섯 명이 2004년 어느 날 함께 탈출을 시도했다. 그런데 4명이 도망 도중에 죽었고 아그네스를 포함한 두 명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는 월드비전에 도움을 받으며 살았는데 2006년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고 했다. 


이제 열일곱 살의 어린 소녀가 겪은 일로는 너무도 참혹했다. 그러나 함께 납치당해간 사람들의 대부분이 죽은 것을 생각하면 아그네스는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예수님을 알지도 못한 채 죽어간 사람들이 많은데 죽음의 세계에서 살아 돌아왔고 또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크리스토퍼 역시 현재 17세의 소년이었다. 여덟 살이던 1998년 11월 어느 주일 밤, 집에서 잠을 자는데 반군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는 납치해갔다. 우간다 북쪽에 있는 나라 수단으로 끌려가 거기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우간다 서쪽에 있는 나라 콩고에 주둔하도록 배치를 받았다. 


몇 년 후에 그는 부대장의 보디가드가 되었다. 나중에 다시 우간다로 배속 받아 돌아오게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 사람 고기를 먹기도 했다고 한다. 반군 중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게 비참한 삶을 살다가 2006년 6월에 친구와 둘이서 밤에 부대를 탈출하여 정부군에 투항해 구출을 받았다는 것이다. 


탈출할 때 높은 벼랑에서 떨어져 아랫입술이 찢어진 흔적이 지금도 크게 남아 있었다. 크리스토퍼도 월드비전에 인계되어 보호와 교육을 받았고 작년 8월에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했다. 반군들은 여자 아이들은 성적 노리개나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해, 그리고 남자 아이들은 총알받이나 혹은 훈련시켜 군사로 쓰기 위해 납치를 한다는 것이다.


이곳 글루 지역이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납치사건이 빈번히 일어났는데 지금은 치안이 강화되어 안전하다고 했다. UN 마크를 단 짚 차가 거리를 달리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글루시 외곽에 있는 난민촌을 방문하게 되었다. 난민촌에 가는 도중에 바로 길 옆에 깨끗하게 잘 지은 학교가 있었다. 간판을 보니 벨기에 정부가 지원하는 중고등학교였다. 학생들도 깨끗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기숙사도 있는 것 같았다. 


거기서 5분 정도 더 가니 난민촌이었다. 20,000여명이 난민들이 집단을 이루어 모여 사는 곳이었다. 모든 집들이 작고 둥글게 지어져 있었다. 대문만 있고 창문도 거의 없었다. 왜 창문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도적을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대문을 열면 바로 앞 집 대문이 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었다. 저들은 대부분 반군들에 쫓겨 집을 버리고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삶은 앨리스 가정보다 더 비참했다. 그들은 난민촌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고 했다. 물론 철조망이 쳐진 것은 아니었지만 말 그대로 창살 없는 감옥처럼 그들은 그 안에서만 생활한다고 했다. 


밖에 나가도 일 할 것이 없었고 그들을 써주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같은 가난한 사람들이면서도 난민들은 가장 하층민에 속했다. 다행히 그 안에는 월드비전에서 지어준 학교가 있었다. 경찰서로 있고 시장도 있었다. 저들이 사는 집 골목 골목을 걸어갔다. 


동네에 아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신발을 신은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온 몸이 먼지로 시꺼먼 아이들이었지만 그래도 마냥 즐겁게 뛰놀고 있었다. 우리가 가는 길에 수십 명의 아이들이 몰려왔다. 얼굴과 손 발 등 온 몸이 새까만데 오직 눈망울과 치아만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전혀 악의가 없어 보였다. 무엇을 달라고 조르지도 않았고 그저 순진하기만 했다. 학교 건물 옆 공터에 중학생 나이의 아이들 열 댓 명이 모여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 앞에서 찬양을 했다. 영어가 아니라 이곳 현지 말로 했다. 우간다는 52종족이 있고 종족마다 말이 달라서 수도 캄팔라 근방에 사는 현지인의 말과 글루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말과 글이 전혀 달랐다. 


우리를 안내하는 에스더는 현지 언어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였는데 글루 지역의 방언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고 했다. 저들이 찬양을 부르는 중에 호산나 할렐루야 라는 말들이 귀에 들려왔다. 이렇게 갇혀진 곳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저들을 보면서 마음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주여 저들의 찬양을 받으소서. 그리고 저들의 호산나 외침대로 저들을 구원해 주소서. 지금은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흑암에 행하던 백성에게 큰 빛이 비친 것처럼 저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큰 빛을 비추어 주소서. 오직 예수님만이 저들의 소망이 되시나이다.’


저들을 리드하는 하는 사람이 저들에게 장래 꿈을 묻자 대부분의 아이들은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어떤 남자 아이는 트럭 운전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한 사람이 그것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고 살짝 귀띔해 주었다. 여기서는 트럭 운전을 배우기도 어렵지만 배워도 써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가장 큰 꿈은 우간다에 분쟁이 사라져 자기들이 떠났던 고향을 찾아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 갓 꿈이지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다. 그래도 이 안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월 16일, 아침 식사 후에 글루를 출발하였다. 오후에 캄팔라에 도착하여 중국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의 중국 식당 음식은 미국의 중국 식당에서 먹는 것과 맛이 전혀 차이가 없었다. 가격은 7, 8불짜리로부터 일인당 30불짜리 요리까지 있었다. 오랜만에 입에 맞는 음식을 먹었다. 


여행자들을 위해 토산품을 파는 가게 3,40개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곳이 있었다. 거기에 들러 각자 사고 싶은 것을 샀다. 그리고 캄팔라 시내를 통과해 엔테베 공항을 향해 가는데 시내에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걸어 다니는지 차와 사람이 뒤범벅이 되어 차들이 제대로 앞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수도 캄팔라에서만 신호등을 볼 수 있었다. 웬만한 곳에는 전혀 신호등이 없었다. 글루도 큰 도시에 속하는 데 신호등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교차로는 영국식으로 로터리가 되어 있어서 차가 돌아가기 때문에 신호등이 없어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래도 교통사고가 난 곳은 한 군데서도 보지 못했다. 곡예운전을 하는 것 같아도 잘들 피해 운전하고 있었다. 


해가 떨어져 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는데도 길가에 장사들은 땅바닥에 물건을 펴놓고 팔고 있었고 사는 손님들도 많았다. 저녁 10시 55분 비행기라 8시가 조금 넘어서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 수속은 복잡하지 않았다. 내 자리 옆에는 60대의 백인 여자 분이 앉았다. 패트리샤라는 이름을 가진 그 분은 캐나다 중부 위니펙에 있는 앵글리칸 교회의 평신도라고 했다. 


미국의 에피스코펄 교회와 같은 것이라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선교 팀 20여명이 우간다에 와서 3주간 머물면서 봉사 활동을 하고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중에는 의사도 있고 목수도 있고 영어 교사도 있다고 했다.


암스텔담에서 우리는 각자 헤어져야 했다. 모두가 좋은 여행이었다고 말했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각자의게이트로 가야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선한 의지가 있게 마련이다. 그 선한 의지를 잘 살린 사람들은 남을 위해 아름다운 일을 하며 복된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그 의지를 어떻게 살려야할지 모르고 또 그런 기회를 만나도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쳐버린 채 다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얼마 전 토크 쇼의 진행자로 유명한 오프라 윈프리는 자기의 쇼에 참석한 사람 수십 명에게 각자 2000불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 돈을 친척이나 친구가 아닌 제 3자를 위해서 선하게 사용하라고 했다. 그리고 후에 다시 모여 그 결과를 서로 이야기 하자고 했다.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삶에 기쁨을 주는 것인가를 체험케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잠 11:25) 남을 윤택하게 하는 사람이 윤택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남을 위한 일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월드비전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구호단체가 되었지만 처음에 밥 피얼스 목사님이 시작할 때에는 한국전쟁 때 부모를 잃거나 남편을 잃은 고아와 전쟁미망인들을 돕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런데 50여년이 지나는 동안 월드비전은 세계 최대의 기독교 구호단체로 성장했다. 


지금 월드비전은 100여개 이상의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약 2만 5천명의 유급 직원들이 있다. 1년 예산이 20억 달러가 넘는다. 미국 월드비전에서만 작년에 약 10억 달러의 실적을 올렸다. 결연 아동들이 약 220만 명이고 그들의 가족과 지역사회를 돌보고 있다. 


또한 전 세계 백만 명 이상의 후원자가 있으며 정부, 기업, 교회, 지역사회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실로 엄청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큰 일이 시작은 아주 작았다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도하며 물질로 도우며 사는 인생은 행복한 인생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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